한국 족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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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 성관을 대상으로 한국 족보의 역사를 알아 보기로 한다.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權幸)의 생졸년은 미상이다. 그러나 서기 930년 왕건이 고창군(高昌郡) 병산에서 백제군과 싸울 때 권행이 크게 공을 세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권행은 서기 800년 후반이나 900년 초반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 된다. 더구나 신라 왕실의 후손으로, 성씨는 김씨였다고 하니 권행은 서기 8백년대를 거슬러 올라가 신라김씨의 천년 D NA를 지니고 있는 셈이지만 권행의 상계 선조 김씨 세계가 명확하지 않아 신라 김씨 천년 역사를 안동권씨 D NA역사에 편입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성화보를 만든 역사는 기원 후 537년이며 안동권씨 실제의 DNA 역사는 서기 800년 후반이나 900년 초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1100년 정도 이어져 내려왔다. 안동권씨 족보는 약1100년의 역사가 담겨 있으며 안동권씨 선비 역사도 약1100년이다. 우리나라는 벼슬을 지낸 이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벼슬을 추증하였다. 이것이 우리의 오랜 관습이다. 안동권씨 후손들이 선비 대접을 받았다. 우리 관습으로 안동권씨 조상들을 선비로 추숭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능성 구씨(綾城 具氏) 시조 구존유(具存裕)의 생졸년 역시 미상이다. 구존유는 1224년(고종 11)에 송나라가 몽골에 패망하자 금성(錦城: 나주의 옛 이름)으로 망명해 왔다. 한편 중국 사료에는 고려인으로 나와 있기도 하다. 그 뒤 구존유는 능성에 세거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능성을 구씨의 관향(貫鄕)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라므로 능성구씨 족보 역사는 약 8백년이다.
연안 이씨의 시조는 당나라 장군 이무(李茂)이다. 그는 660년 나당연합군의 중랑장(中郞將)으로 소정방(蘇定方)을 따라왔다가 신라에 귀화하였다고 한다. 그 뒤 황해도 연안에 터를 잡아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연안이씨 족보 역사는 약간 깍아내려도 약1400년이 된다.
창녕성씨 시조 성인보(成仁輔)는 고려 후기 사람으로 호장중윤을 지냈다. 신라 때의 인물인 성저의 후예로 알려졌다. 성인보의 후손은 경상남도 창녕군에 세거하며 창녕을 관향으로 삼았다. 고려 후기 인물이라 하니 고려후기 어느 때인지 추정하기가 곤란하다. 창녕성씨 족보의 역사 추정은 불가한 상태이다.
초기 단계의 13개 성관 중 4개를 뽑아 족보 역사를 알아 보았다. 외형적으로 족보를 만든 역사는 537년부터 397년 사이에 있다. 그러나 그 내부로 눈을 돌려 족보에 실린 내용물의 역사는 착수부터 난관에 봉착하여 조선왕조 분의 전체 족보 내용물의 역사를 알아보는 작업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다. 그러나 이들을 통해 우리 족보의 시조부터 지금까지 약 800년에서 약1400년의 역사가 있다는 정도 짐작하는 선에 그치고 말았다. 추정작업의 대상을 신라 김씨나 가락김씨로 확대하면 족보의 역사가 약2천년은 족히 될 것으로 본다.
한국 족보의 뿌리 [2]
강릉김씨 시조 김주원은 생몰년 미상. 무열왕의 둘째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의 5대 손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무열왕의 셋째아들인 문왕(文王)의 5대손이라고 한다. 777년(혜공왕 13) 이찬(伊飡)으로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 그는 신라 하대의 세력 서열에서 제일인자다.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칭해졌으며,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주원의 후손들은 명주(溟州 : 지금의 江陵) 지방에서 명주도독을 대대로 지내며 지방 호족 세를 떨쳤다. 그의 후손 중 김헌창(金憲昌)·범문(梵文) 부자는 중앙에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고려 개국시 공을 세워 계속 강력한 호족 세력을 유지하였으며 조선조 후기에 문벌이 좋았다.
생졸년은 미상이나 777년에 재상을 지냈으니 700년대 초경에 출생한 것으로 추측 된다. 김주원으로부터 세계(世系)가 면면이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으니 강릉김씨 족보의 뿌리는 김주원으로부터 약1300년에 이른다. 그러나 김주원은 신라 왕실의 혈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김주원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김알지까지 그 뿌리를 확대하면 그 역사는 무척 길어진다. 김알지는 신라 상대의 씨족장이며 경주김씨의 시조가 되기도 한다. 김알지는 신라 탈해이사금 9년[65년]에 태어났으며 졸년은 미상이다. 강릉김씨 족보의 원뿌리는 김알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2천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영양 남씨는 의령남씨·고성남씨와 함께 남민(南敏)을 시조로 삼고 있다. 남민은 원래 중국 봉양부 여남(汝南)[지금의 하남성 여남현] 사람으로 본명은 김충(金忠)이었다. 그가 755년(경덕왕 14) 안렴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지금의 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에 표착한 후 신라의 풍광이 아름다우며 인심이 순박한데 매력을 느껴 영양현에 터를 잡고 살았다. 경덕왕은 남씨로 사성(賜姓)하고 이름은 민(敏)으로 지어주었다. 남민의 생졸년은 미상이나 755년에 안렴사를 지냈으니 700년대 초에 출생한 것으로 보면 영양남씨의 족보의 뿌리는 약1천3백년의 역사를지니고 있다.
선산김씨 시조 김선궁(金宣弓)은 통일 신라 시대말경 사람으로 고려 태조가 숭선(嵩善: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에서 후백제를 치기위하여 군사를 모집할 때 응모하였다. 왕건은 그의 용력을 치하하면서 자기가 쓰던 활과 선궁이라는 이름을 함께 하사하였다. 김선궁의 생졸년은 미상이나 그가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경북 일대에서 정벌할 때 공을 세운 때가 930년 경이다. 그의 출생은 800년대말에서 900년 초경으로 추측 된다. 선산김씨 족보의 뿌리는 약 1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경주이씨 시조 이알평(李謁平)은 신라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었다. 그는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이 된 뒤 아찬에 올라 군무(軍務))를 장악했으며 유리왕 9년 양산촌(楊山村) 이씨(李氏)로 사성(賜姓)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의 계대(系代)를 실전(失傳)하였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원대손(遠代孫)인, 신라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세계(世系)를 적은 것이 연유가 되어 그가 중조(中祖) 곧 기세조(起世祖)가 되었다. 경주이씨 족보의 뿌리는 2000여년이 되지만 이알평이후 이거명까지 세계(世系)를 잃어버려 얼마간 단절이 있었던 관계로 이거명부터 면면이 이어온 역사가 약1100년쯤으로 추측 된다. 이거명의 생졸년은 미상이나 신라 말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문화 류씨 (文化柳氏) 시조는 류차달(柳車達)이며 오늘날 황해남도 신천군 문화면에서 출생하였다. 『문화유씨족보(文化柳氏族譜)』에 의하면 고려 태조 때의 개국2등공신 12인 중의 한 사람으로 고려 태조로부터 사명(賜名)을 받았다고 한다. 생졸년은 미상이나 그의 출생은 통일신라 시대 800년대말에서 900년대 초반으로 추측 된다. 문화류씨 족보의 뿌리는 약1100쯤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청주한씨는 그 연원을 기자(箕子)의 원손인 준왕(準王)으로 하고 있다. 준왕은 기원전 195년 연인(燕人) 위만이 조선에 망명해와 그를 박사로 삼았으며 위만이 쿠데타를 일으켜 위만조선을 건국하자 기원전 194년 남으로 내려와 한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준왕의 생졸년은 미상이나 준왕의 활동 연대를 감안하면 서기 100년대 초반이나 중반 이후 쯤 태어났을 것으로 본다. 청주한씨의 족보의 뿌리를 준왕으로부터 따진다면 약2200년 내지 2100년이 좀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준왕 이후 소목이 분명치 않아 후손들이 한란을 시조로 하고 청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한란(韓蘭)은 928년(태조 11) 청주 지방의 호족으로 왕건(王建)이 후백제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다. 한란의 생졸년은 미상이나 한란의 출생은 800년대 말에서 900년대 초경으로 추측 된다. 청주한씨 족보의 뿌리는 약 1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광산김씨(光山金氏) 시조는 김흥광(金興光)이다. 김흥광은 신라 신무왕(神武王)의 셋째 아들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신라의 비운을 예견하고 경주를 떠나 무진주(武珍州) 서일동(西一洞)[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은거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광산[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김흥광의 생졸년은 미상이나 통일신라시대 신무왕(神武王) 때 태어났다고 한다. 신무왕의 출생년도는 미상이나 839년에 졸하였다. 김흥광은 700년대 후반이나 800년대 초반에 태어났을 것으로 본다. 김흥광으로부터 족보의 뿌리를 따지면 크게는 약1400년 적게는 약1300년 쯤의 역사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김흥광이 김알지의 후손이니 김알지부터는 2000여년 역사를 지니고 있다.
반남박씨 시조는 박응주(朴應珠)이다. 박응주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오늘의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에 터를 잡아 그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박응주는 고려 말기의 호족이었다. 박응주는 1300년대 초반이나 1300년대 중반을 좀 넘어 출생하였을 것으로 본다. 박응주로부터 족보의 뿌리를 따지면 크게는 약700년, 적게는 약620여년 쯤의 역사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반남박씨의 족보의 뿌리를 박혁거세로부터 따지면 2000년이 좀 넘는 역사를 지닌다. 박혁거세는 BC57년에 출생하였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비치된 숙종 시대 족보를 통해 한국 족보의 뿌리를 따져 보았다. 그 결과 강릉김씨는 2천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광산김씨와 반남박씨도 2천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뒤를 이어 영양남씨가 약1천3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선산김씨는 약 1100년, 경주이씨도 약1100년, 문화류씨도 약1100년, 청주한씨도 약1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 족보의 뿌리는 대체로 천년을 넘어 2천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사가(私家)에서 세계(世系)가 끊어지지 않고 족보의 역사가 1000년, 2000년을 연면 하는 나라는 지구촌에서 한국이 유일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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